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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역사와 현재

고선옥 2017.03.20 18:21 조회 수 : 102

고려인의 역사와 현재

 

 

고려인은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용어이다. 러시아어로는 ‘카레예츠(까레이스키)’라고 하며, 현지의 한인들은 스스로를 ‘고려사람’이라고 부른다. - 사할린 한인들은 역사적 형성과정의 차이로 인하여 고려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한인들이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러시아령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1863년을 원년으로 보고 있다. 1858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 사이에 이루어진 아이훈 조약에 의해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고,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 이후 연해주의 우수리강 주변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면서 러시아 정부는 극동 지역의 러시아화와 이곳에 확고한 농민계급 정착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러이사인의 극동지역으로의 이주가 진행되었지만 희망하는 러시아 이주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는 경제개발과 더불어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결국 러시아 차르 정부는 ‘러시아인 및 외국인의 러시아 극동지역으로의 이주’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여 국내 및 국외로부터 노동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면서 조선 북부로부터의 이주민을 수용하게 되었다.

 

 

최초의 이주 한인은 1863년(철종 14년. 당시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기였다.) 겨울 함경도 지역 14가구 65명의 조선인들로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령 남우수리스크 지역에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촌락을 만들었는데 이는 바로 우리 한인 동포들의 해외 이주 기원이 되었다.

 

이후 점차적으로 늘어나던 한인 촌락은 1866년 100여 가구가 되면서 한인들의 러시아 극동지역으로의 이주는 급격히 확산되다가 조선에서의 대기근과 1869년 조선 북부지방의 대홍수로 인하여 이주민 수는 점점 증가하여 1877년에는 6142명, 촌락만 20곳이었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한인의 극동으로의 이주가 진행되는 동안 한인들은 근면함과 뛰어난 토지경작 및 농경기술로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던 극동지역 개발과 경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0년대에도 여전히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이루어져 러일전쟁(1904년) 직후 러시아 극동 지역에만 34,00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위 50도를 경계로 사할린 남부 지역은 일본령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러시아 극동 지역은 한인 의병들의 활동과 독립군의 기지로서도 역할을 하여 이범윤과 이상설은 지휘관으로 활동하였고, 안중근 또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0년대 소련의 국내 정치적 상황은 한인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나타났다. 1937년 스탈린 정부의 민족적 특색의 말살과 획일화 정책, 고양되어가던 전전(戰前)의 분위기 속에서 ‘극동지역에서 일본 간첩 행위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소련 극동 지역 거주 한인들의 강제 이주 조치가 진행되어 한인들 전원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소련 정부의 한인의 강제 이주에 대한 진정한 이유에 대하여 많은 연구자와 학자들은, 한인들이 벼농사 등의 재배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것과 한인들이 극동지역에서 국가 형태의 민족 공동체를 성립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보인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면적은 극동 지역에 비해 수십 배나 크기에 한인의 이곳으로의 이주는 자연히 스탈린 정부의 민족적 특색의 말살정책에 의한 한인 분산시키기에 용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진행된 집단화 정책 결과 이 지역민들의 수백만 명이 죽었고 수십만이 달아나 이 지역에서의 노동력이 극히 부족해짐에 따라 한인의 강제 이주를 통해 벼농사와 채소 재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 강제 이주에 대한 신빙성 있는 주장들이다.

 

 

강제 이주가 진행되면서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등지의 추운 들판에 버려지다시피 하면서 이로 인해 환경의 열악함으로 병들고 죽어갔다. 그러면서도 한인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역경을 견디어내며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비옥한 옥토로 바꾸며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고,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게 된다. 자료에 의하면, 강제이주된 직후인 1939년 소련 거주 한인은 182,300명, 1959년 357,700명, 1979년 388,900명이었고, 1989년 439,000명에 이르게 된다.

 

 

한편 1945년에 남사할린이 소련에 재편입되면서 그곳에 잔류하던 43,000 여명의 한인들이 소련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징용된 사람들과 그 가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어도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대륙의 소련 한인들과 역사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처음에는 고국인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소련 한인의 구성은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이주하여 생활 기반을 잡았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태어나 살았고 1937년에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 및 지리적으로 시베리아 이서 지방에 거주한 덕분에 강제이주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 이들을 이른바 ‘고려인’이라고 한다면, 일본에 의하여 강제 징용된 사할린 한인 등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볼 수 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소련이 15개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되면서 고려인들은 여러 민족국가의 국민으로 나누어지는 가운데 이들 국가들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다시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연해주 지방에도 다수의 고려인들이 거주하면서 자치회가 형성되어 있다.

 

 

언어 문화적으로도 고려인들은 큰 변화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1937년 강제이주 이전만 하더라도 극동 지역의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도 교육언어로 유지되었으나 , 1939년부터 이러한 제도는 폐기되어 전면적인 러시아어 교육이 강요되었고 한국어는 고작 2-3시간 외국어로 교육될 뿐이었다. 그 결과 한국어 사용은 고려인들 속에서 소홀히 되었고,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구사할 수 있어야만 국가와 사회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러시아어가 제1언어로 굳어져 갔다.

 

현재는 고려인들이 속해 있는 각 민족국가들이 주류 민족의 언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가운데 이들 언어를 도외시 할 수 없다는 점이 고려인들이 현재 안고 있는 언어 문제이다.

 

 

2005년 8월 현재 고려인은 러시아에 19만 671명, 우즈베키스탄에 20만 917명, 카자흐스탄에 10만 3676명, 키르기스스탄에 2만 394명, 우크라이나에 1만 3111명, 투르크메니스탄에 420명, 타지키스탄에 1783명, 벨라루스에 1327명, 몰도바에 258명, 조자아에 20명, 아제르바이잔에 63명, 아르메니아에 30명 등 총 53만 2697명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자료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려인 인구 이동과 경제 환경」(남혜경, 임채완, 최한우, 이원용, 심현용, 강 명구, 집문당, 2005)

 

 

 한글사랑샘 회원 조영주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